시민공감 기자단 기사

대전의 문화유산, 고 임길순 성심당 창립자와 이만희 대전무형문화재 기획전 [살아있는 문화유산 이야기 : 두 사람의 인생과 유산]

시민기자단_고혜정

“아들, 도착하면 점심시간이네. 뭐 먹을까?”
“엄마,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오랜만에 튀김소보로 먹고 싶은데요. 점심은 집에 가면서 생각해봐요.”
“응, 빵부터 사 갈게.”

타지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들이 한 달 만에 내려왔습니다. 대전복합터미널로 데리러 가는 길에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봤더니 너무 허기진다며 빵부터 먹고 싶어 했습니다. 시외버스 도착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중앙로역에서 내렸습니다. 발걸음을 서두르면 빵도 사고 버스 환승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모든 일이 뜻대로 이뤄지기는 쉽지 않은 법, 성심당 본점 앞을 지나 건물 외벽을 따라 긴 줄이 이어졌습니다. ‘설마 이 많은 사람이 다 성심당 손님일까?’ 싶었는데 긴 줄 끝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라지고 나들이하기 딱 좋은 가을이라지만, 일도 공부도 내려놓고 온전히 놀고 싶은 일요일 낮이지만, 소제동부터 중앙시장을 지나 원도심까지 대전 0시 페스티벌이 한창이라지만 빵을 사기 위해 이렇게 긴 줄을 서다니, 도대체 성심당이 뭐길래 사람들은 1시간 가까이 기꺼이 내놓을까요?

제 궁금증을 단숨에 날려준 소박한 전시가 지난 10월 19일부터 11월 6일까지 대전전통나래관과 성심당문화원에서 열렸습니다. 대전전통나래관은 대전역 뒤편에 위치한 대전 대표 무형문화재 전승 및 육성기관입니다. 대전전통나래관이 자리한 소제동 일대는 뉴트로 감성을 즐기고 싶은 MZ세대들에게는 카페 거리로 더 유명하지만, 알고 보면 대전의 100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지요.

소제동은 옛날부터 풍광이 아름다운 호수가 있던 곳입니다. 여름이면 연꽃이 장관이던 이 호수 주변에는 솔랑이라는 전통마을이 있었고 조선 후기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 선생이 말년을 보냈던 곳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논밭이 지천이던 대전에 1904년 경부선과 1914년 호남선이 개통하면서 이곳에 소제동이라는 마을이 만들어집니다. 호수를 에워쌌던 솔랑산을 허물고 그 흙으로 축구장 일곱 배 크기의 소제호를 메웠습니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대전 유생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우암 송시열 선생의 흔적을 지워 독립에 대한 의지와 민족혼까지 없애려는 일제의 만행이었지요.

철도 근로자들이 거주하는 철도관사촌이 형성되어 한 때 100여 채의 관사가 들어섰던 소제동은 근대도시 대전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되고 한국전쟁을 견뎌낸 마을은 도심의 기능이 둔산권으로 이전하면서 서서히 성장을 멈추고 1920~30년대 일본식 가옥과 1960~70년대 시멘트 벽돌집이 뒤섞인 채 박제처럼 남아 사람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아스라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대전역 너머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철도 도시 대전의 시작인 동네가 있다고 처음 알린 게 대전전통나래관입니다. 2014년 2월 개관한 이후 대전 무형문화재의 전통과 현대를 잇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문화 인프라 확충으로 원도심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20년 넘게 입에서 입으로만 떠돌던 재개발 기대에 오래된 집들이 비워지고 무너져 갈 때도 서울의 자본이 들어와 다양한 카페가 골목골목을 채울 때도 대전전통나래관은 변함없이 소제동 입구에 우뚝 서서 동네를 지키고 있습니다. 대전무형문화재 기능 11종목을 조명하는 상설전시와 특별전시를 개최하고 해설이 있는 무형문화교실, 무형문화전수학교, 대전수라간 등 기능종목 전수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덕분에 대전시민들은 지역의 무형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대전무형문화재들은 공방에서 나와 대전시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소제동의 문화유산을 활용하여 대전문화재야행, 달빛 따라 문화재탐방, 소제동마천루 등을 정기적으로 개최합니다. 동네 특성상 문화예술을 향유하기 어려운 소제동 주민들에게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신도심에 사는 이들을 소제동으로 불러들이고 있지요.

기획전 포스터

기획전 포스터

이곳에서 지난 10월 19일부터 11월 6일까지 <살아있는 문화유산 이야기 : 두 사람의 인생과 유전>이라는 기획전이 열렸습니다. 이 전시는 지역의 무형문화재와 지역의 기업을 연계하여 지역사회와 시민이 함께 즐기고 지켜나가는 무형유산을 만들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연안 이씨가의 각색편은 우리의 전통 떡으로 지난 2000년 대전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56년 대전역 앞 작은 찐빵집에서 시작한 성심당은 오늘날 대전 대표 향토기업으로 성장했지요. 전통의 떡과 근대 이후 등장한 빵, 다른 듯 비슷한 두 음식을 통해 문화와 유산에 대해 생각해보는 자리였습니다.

대전무형문화재 제10호 각색편 기능보유자인 이만희 선생은 1937년 전북 익산에서 연안 이씨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 집안은 26대조가 고려 의종(1185년) 때 판소부 감사 겸 지방다사(왕의 검식관)를 지낼 정도로 왕실과 인연이 깊었다고 합니다. 연안 이씨가에 시집을 온 이만희 선생의 친정어머니는 맏며느리로서 전통음식과 궁중음식 등 여러 음식의 제조비법을 전수받았고 이만희 선생은 어려서부터 옆에서 거들며 1남 6녀 중 유일하게 배우고 익혔습니다. 23세 되던 해에 대전으로 시집와서는 연안 이씨가 대대로 내려온 전통 방식 그대로 떡과 이바지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떡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각색편은 멥쌀가루에 대추나 잣 등을 얹어 만든 떡으로 예로부터 궁중이나 반가에서 큰 잔치가 있을 때 만들던 것인데 그 가치를 인정받아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에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음식 분야 무형문화재 중 떡으로는 유일합니다.

성심당 창업자 고 임길순 선생은 1912년 함경남도 함주(지금의 함흥)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과수원을 운영하던 그는 해방과 함께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신앙의 자유를 억압받습니다. 195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알려진 마지막 피난선 메러디스 빅토리아 호를 타고 흥남부두를 탈출합니다. 거제도에서 내려 진해에서 냉면집을 열었지만 여의찮았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서울로 떠났다는데요. 운명처럼 서울행 기차는 대전역에서 고장이 났고 임길순 선생 가족은 대흥동 성당을 찾아가 밀가루 두 포대를 선물 받았다지요. 밀가루 두 포대로 시작한 찐빵집 성심당은 1967년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고 임길순 선생과 이만희 선생처럼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동족상잔의 비극과 굴곡진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분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각자가 택한 업대로 누군가는 빵을 구우며 누군가는 떡을 만들었지만 그들의 삶이 평범하지 않고 대전을 대표하는 문화로, 당대를 넘어 미래에까지 전해져야 할 문화유산으로 꼽히게 된 데는 남다른 헌신과 소명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임길순 선생은 ‘흥남부두에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겠습니다’라는 맹세를 매일 매일의 빵 나눔으로 실천했고 이만희 선생은 유전자에 각인된 연안 이씨가의 각색편 제조 기술을 한 집안을 넘어 우리나라 음식 분야의 전통으로 남기고자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사전에서는 ‘문화’를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이 습득하는 모든 능력과 습관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총체’ 혹은 ‘한 사회의 개인이나 인간 집단이 자연을 변화시켜온 물질적·정신적 과정의 산물’이라고, 그중에서도 후손들에게 물려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문화유산’이라 정의합니다. 이 기획전을 통해 평범한 빵과 떡이 어떻게 대전의 문화가 되었는지 과거에서 와 현재를 지나 미래에 이르는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전시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두 개의 나무 프레임 안에는 고 임길순 선생과 이만희 선생의 사진이나 초상 대신 작은 오브제가 담겨 있었습니다. 왼쪽에는 성심당의 시작인 대흥동성당을 상징하고 사람들을 섬기겠다는 성심당의 초심을 상징하는 작은 종이, 오른쪽에는 한 집안의 음식을 넘어 대전을 대표하는 무형유산이 된 떡을 찌고 싸는 천 보자기가 두 사람의 삶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기획전 <살아있는 문화유산 이야기 : 두 사람의 인생과 유산>을 놓쳐서 아쉽다면 성심당문화원에서 임길순 선생의 삶을, 대전전통나래관 상설전시실에서 이만희 선생의 삶을 더듬어볼 수 있습니다. 고색창연하지 않아도 근엄하지 않아도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즐겨 먹는 빵과 떡이 품은 소중한 가치를 만날 수 있습니다.